재고 숫자는 왜 ERP가 아니라 엑셀에 있을까
"지금 그 자재 몇 개 남았어요?" 이 질문에 ERP 화면이 아니라 담당자의 엑셀과 전화로 답하는 회사가 많습니다. 작아서도, 담당자가 게을러서도 아닙니다. 대기업 ERP 혁신 책임자의 이야기와 우리가 본 공장에서 그 이유를 짚습니다.
대기업도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지금 그 자재 몇 개 남았어요?" 많은 공장에서 이 질문의 답은 ERP 화면에 있지 않습니다. 담당자의 엑셀에 있거나, 현장에 거는 전화 한 통 끝에 있습니다.
작은 회사라서 생기는 일이 아닙니다. 화장품 제조 대기업 코스맥스의 고종옥 PI혁신부문장은 2026년 10월 공개된 팟캐스트 인터뷰(AI Frontier Korea)에서 같은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지금 재고가 몇 개인지, 이 제품을 만들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같은 회사의 단일 정본은 ERP에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ERP 밖에 있는 경우가 많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본인도 그럼 ERP는 왜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유는 사람이 아니라 장부의 설계에 있습니다
그가 든 이유를 우리말로 옮기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 회사가 빨리 커서 기록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지금 몇 개인지를 계산하려면 수많은 기록을 엮어야 하는데, 자재 정보만 수십만 건이 넘습니다. 이걸 매번 실시간으로 하기는 어렵습니다.
둘째, 매번 반영하면 시스템이 무거워집니다. 그래서 생산 실적 같은 기록은 정해진 때에 몰아서 처리합니다. 그가 다루는 시스템에는 한 번 도는 데 일고여덟 시간 걸리는 처리도 있다고 했습니다.
셋째, 업종에 맞지 않습니다. 완제품 종류가 적은 업종은 넉넉히 만들어 두면 되지만, 종류가 많고 주문마다 다른 업종은 미리 만들어 둘 수 없습니다. 들어오는 대로 만들수록 오늘 몇 개 더 들어왔는지가 중요한데, 장부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애초에 ERP는 회계 장부를 정확히 남기는 데 맞춰 설계된다는 점도 같은 인터뷰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현장은 전화로 확인하고, 각자의 엑셀로 맞추고, 끝난 뒤에야 장부에 넣습니다. 함께 출연한 노정석 비팩토리 대표는 이것을 부서마다 엑셀을 두고 전화와 메신저로 맞춘 다음 결과만 ERP에 기록하는 방식이라고 정리했습니다.
우리가 본 공장도 같았습니다
다부가 제조 현장에서 들은 이야기도 다르지 않습니다. 테이프 공장에서는 장부에는 있는데 실물은 없는 재고 때문에 확인 전화가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갔습니다. 배전반 회사는 품목이 약 8,000개인데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알루미늄 주조 회사에서는 수주가 들어와도 자재가 충분한지, 출고 뒤 재고가 얼마나 남는지 한눈에 보기 어려웠습니다.
규모는 훨씬 작지만 이유는 같습니다. 장부는 결과를 남기고, 결과를 만드는 확인은 장부 밖에서 일어납니다.
장부를 바꾸면 해결될까
여기서 "더 좋은 ERP로 바꾸자"는 결론이 나오기 쉽습니다. 그런데 장부는 회계사무소와 세무 신고가 믿는 기록이고, 바꾸는 데 드는 비용과 위험이 큽니다. 새 장부도 결국 결과를 받는 자리라는 점은 같습니다.
다부가 택한 방법은 장부를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수량이 바뀌는 자리, 곧 입고하고 옮기고 꺼내 쓰는 자리에서 바로 기록을 남길 수 있게 맞추고, 그 기록을 사무실·현장·관리자가 같은 화면에서 이어봅니다. 결과는 쓰시던 엑셀과 양식으로 장부에 넘깁니다.
"지금 몇 개"를 전화로 묻는 횟수가 하루에 몇 번인지 세어 보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숫자가 장부 바깥의 일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줍니다.
출처
- AI Frontier Korea EP117 「강북의 IT가 바뀐다: AI 시대의 ERP와 지식 노동」, 노정석 × 고종옥, 2026년 10월 3일 녹화. https://youtu.be/NJJYtWhaPRs (해당 대목 10:02, 52:53~57:27). 인터뷰 내용은 자막을 바탕으로 요지를 옮겼습니다.
- 현장 사례는 회사 이름을 빼고 업종만 남겼습니다.
우리 회사에서 장부 바깥으로 빠지는 확인과 반복 입력이 어디에 있는지 함께 살펴봐 드립니다.